이 메뉴얼을
쌤이 다 만들었다고요?
4월의 햇살로 S쌤의 교실도 뜨끈하죠?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오후에 한참 글쓰기 숙제 검사를 하고 나니 졸음이 몰려와요. 스르륵 감기는 눈을 치켜 올려야겠어요. A쌤을 꼬셔 커피 한 잔을 하려고 옆 반 교실에 갑니다. “라떼 아님 아메리카노?”라고 말하는 순간, 교탁에 올려진 못 보던 책으로 눈이 향하지요. 궁금증이 발동한 나의 눈빛을 읽은 A쌤.
“아, 그거 보드게임 메뉴얼이요? 우리반 애들이랑 같이 할 보드게임을 만들었는데, 게임 방법을 말로 설명하기가 복잡해서 그냥 책으로 제본을 했어요.”
쉬는 시간에도 늘상 교실이며 복도 바닥에 둘러 앉은 A쌤 반을 보아왔어요. 방역 수칙을 지키느라 학교에 와서도 놀잇감이 마땅찮은 팬데믹 시대의 아이들. 그치만 이 반 아이들은 보드게임에 푹 빠진 담임쌤을 만난 행운으로 학교생활이 즐겁더라고요. 둘 이상 마음이 맞으면 보드게임을 하나 골라 그 자리에 털썩. 게임판을 사이에 두고 웃음과 대화가 오가요. 그 중에는 A쌤이 직접 만든 보드게임, 아이들과 함께 구상한 보드게임도 여럿 보여요.
“오호, 이 메뉴얼 퀄리티가 보통이 아닌데요!?”
“그래요? 처음엔 간단히 놀이 방법만 설명하려 했는데, 만들다보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사진도 넣고 대진표도 넣다보니 서른 쪽이 넘어갔어요.”
”아이들한테 한 권씩 나눠줄거에요?”
스무 권 남짓 되는 책을 만드느라 들인 A쌤의 품이 눈에 보이는 듯 해요. 글을 쓰고 줄과 열을 맞추는데 들인 시간, 표지와 속지를 디자인하는 고민, 한참을 들여 출력하고 순서를 맞추어 종이 가운데를 스템플러로 찍었겠지요. 두꺼운 종이를 꾹꾹 눌러 한 권 한 권을 완성했을 수고로움으로 이 책이 여기에 있을테죠.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과정인지 S쌤도 알죠? 지난 번에 학급문집을 만들어보았잖아요.
말이 바람으로 흘러
사라지지 않고
그때 학급문집 만들면서 고생 많았죠? 학기 말에 며칠 동안이나 퇴근이 늦었던 S쌤을 기억해요.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해 봐요. 제본한 책으로도 그렇게나 좋은데, 모은 글과 그림이 번듯하게 정식 출판물로 완성된다면 아이들이 얼마나 뿌듯할까요? 자신과 친구의 책을 서점에서 사 읽는다면 글을 쓰는 아이들의 마음가짐이 지금과는 다르겠죠. 그렇게 된다면 학급운영비로 책을 사서 나눠가질 수도 있겠죠.
이음연구소의 <당신의 교육철학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프로그램 때 인터뷰이로 참여해줘서 고마워요. 그때 S쌤의 이야기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에게 좋은 사례가 되었어요. ‘푸른 물결’이라는 닉네임을 쓰신 분이 말씀하시길,
“이 책에 저의 학급운영 철학이 담겨 있으니, 학부모 총회 때 한 권씩 나눠드리면 담임교사 소개로 이만한 게 없겠어요.”
‘그렇네?’ 들으면서 생각했어요. ‘선생님들의 경험이 책이 되는 일이 자연스러우면 좋겠구나.’ 우리 교사들의 생각이 말의 바람으로 흘러 사라지지 않고, 글과 책으로 묵직하게 남는걸 보통의 일로 여기는.
그런 책을 어디다 쓰나 싶기도 하죠. 우리에게 ‘교사의 책’이 아쉬었던 때를 기억해요. 교원학습공동체 모임 때 무슨 책을 읽을까 의논하던 날, S쌤의 말이 모두에게 공감이 되었던 순간.
“교수님들이 쓴 교육관련 책이 나쁘진 않은데, 우리반에는 잘 안 맞는다는 느낌이 있어요.”
그럴 듯한 이론보다는 옆 반 선생님에게 전해듣는 이야기같은 책. 그런 책이 많으면 좋겠다는 공감이 그 자리를 채웠어요.

가르침이 책이 되는 일이
일상이 된다면
다음 날 우리반 통신문을 가지려 간 학년 연구실에서 A쌤과 마주쳤어요.
“제가 나가는 이음연구소 알죠? 거기서 출판사를 시작할까 상의하고 있어요.” ”오 대박, 근데 출판사 하기 어렵지 않아요? 많이 망한다던데.” ”그렇긴 한데, 어제 쌤이 만든 보드게임 메뉴얼 보면서도 출판사 생각을 했어요. 그냥 한 해 쓰고 사라지기엔 너무 아까워요.”
그래요, 너무 아까워요. 선생님들의 애써 만든 수업 자료가 여러 해 동안 빛을 보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반을 넘어 다른 어느 학급에 반가운 자료로 환영받는 가치를 발견하면 좋겠어요. 가르침의 이야기가 책이 되는 것이 특별한 일 아닌 일상이 된다면. 하나의 수업, 한 해의 경험이 손가락 사이 모래처럼 사라지지 않고, 단단한 결과물로 동료 선생님들의 손에 건너쥐어 진다면 어떨까요.
머그컵에 뜨거운 뭇을 붓고 있는 A쌤의 뒷모습을 향하여 용기를 내어 말했어요.
“혹시 만든 보드게임 메뉴얼을 정식 책으로 만들 수 있으면 어떨것 같아요?”